After the Hull: Ahnnlee Lee
밀어낸 자리로부터,
햇볕을 견딘 식물의 껍질, 오래 살아낸 손등의 피부, 수없이 갈아낸 매끄러운 외피. 이안리의 작업을 볼 때마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떠올렸다. 어떤 것은 오돌토돌 거칠었고, 어떤 것은 미끄러워 보일 정도로 매끄러웠고, 어떤 것은 조심스레 들어내면 벗겨질 것처럼 너덜거렸다. 때로는 그 껍질을, 피부를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그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표면이 그 아래에 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언제나 시간과 과정을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하얀 더러움'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깨끗하고 뽀얀 흰색이 아니라, 오래된 집의 벽처럼 때가 묻고 빛바랜 흰색. 이는 시간을 통과하며 다른 존재와의 접촉을 통해 두터워진 상태, 즉 시간이 침투한 흰색이다.
그러고보면 표면은 언제나 세상과 마찰하며 닳고 손상된 상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다른 존재와 마주치고 관계 맺었다는 흔적이며, 변화하며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안리의 작업도 그러하다. 종이 위에 연필 선을 반복해서 긋고, 모래를 캔버스 위에 문질러 바른 뒤 다시 지우고 또다시 덮는다. 과정 속에서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표면에 축적된다. 어떤 표면은 반드시 시간이 있어야만 가능하고, 그렇게 드러난 표면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시작하기 전, 작가가 만든 표면을 만져볼 기회를 얻었다. 이안리는 내게 '직접 만져보면서 글을 써달라'며 20년 치 드로잉 묶음을 건넸다. 이것을 받아들어도 될지 고민도 잠시, 이내 호기심이 앞섰다. 묵직한 드로잉 묶음을 들고 작업실로 돌아오는 길, 다른 말보다 '만져보라'는 말이 내내 나를 따라왔다. 이 그림들의 표면을 만지다 보면, 여기 담긴 시간을 알 수 있을까?
맨얼굴을 만져보는 일
이안리는 자신의 회화나 조형 작업에서 드러나는 살짝 어긋난 틈, 미세한 감각들을 이야기하며, 그 조그마한 것을 그리기 위해 전체를 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는 거대한 세계를 묘사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표면에 드러나는 아주 작은 감각에 이미 세계 전체가 스며 있다고 믿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드로잉은 작가가 만들어낸 작업 중 가장 덜 가공된 것이다. 매 장마다 당시의 좌표와 감각의 두께, 삶의 높낮이 같은 것들이 만져진다. 그래서 전시장에 걸린 드로잉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먼지 쌓인 두터운 드로잉 노트를 파헤치는 일은 매우 다르다. 후자는 한 작가의 내면의 지형도 같은 것이어서, 보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보기를 주저하게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 보이려고 그린 것이 아닌 그림들을 모아두었을 때, 우리는 작가의 '원형(archetype)'을 더욱 선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내게 건네진 드로잉들은 종이 위에서 복잡하게 퇴적한 냄새를 지니고 있었다. 빛바랜 색 위로 그가 말하는 감각이 날 것처럼 살아 숨 쉬고 있었다. 20년 치의 시간이 담긴 종이 뭉치에는 한 사람이 살아낸 시간의 속살이 담겨 있었다. 모래를 바른 캔버스, 배와 바다의 시간을 품은 조형물 또한 그 내부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얇은 종이들은 한 사람이 끝까지 세상을 향해 밀어붙인 내면의 가장 바깥, 한 세계의 가장자리였다. 가장 안쪽에서부터 밀어붙인 힘이 표면에 다다르면 그것은 껍질의 모양이 되어 세상으로 떨어진다.
나는 그의 드로잉을 만지작거리며 껍질 혹은 몸체에서 떨어진 꽃잎이나 나뭇잎 같은 것들을 목격했다. 그것들을 넘기고 고르는 사이, 마치 한 사람의 맨얼굴을 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면과 마찰
이안리의 작업에서 표면을 주목해온 이유는, 단지 모래를 섞어 바른 질감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을 밀어붙인 흔적이 배어났기 때문이다. 그 표면은 때가 되어 벌어지고 벗겨지는 씨앗의 껍질, 만개한 꽃의 시간이 지난 뒤 마침내 떨어지는 꽃잎, 봄과 여름을 살아내고 하강하는 낙엽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이 씨앗이든 꽃이든 나무든 사람이든, 모든 생명은 가장 안으로부터 가장 바깥으로 에너지를 밀어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러니까 표면은 단순히 외부를 감싼 표피가 아니라, 내부에서 밀어붙인 힘이 시간을 들여 도달한 자리,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가장 첫 번째 장소다. 그리고 가장자리로 밀어붙인 시간이 쌓이고 쌓여서 어떤 지점에 도달하면, 시간을 다한 것은 떨어져 나간다. 껍질이나 꽃잎, 낙엽, 피부의 각질 같은 것처럼. 그러나 떨어져 나온 것은 쓸모없는 것도, 버려진 것도 아니다. 몸체와 떨어진 별도의 존재로서, 그 자리로부터 다른 시간을 지닌다.
이안리가 이번 전시에서 주요 재료로 삼은 배의 껍질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선체에서 떨어져나온 것이다. 배의 몸체가 바다라는 세계와 접촉하며 통과한 시간의 감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물질, 혹은 떨어져 나간 배의 피부다. 그러니 작가가 이것을 주워서 작업 속으로 들여온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줍기를 좋아한다는 작가와 함께 긴 이야기를 나누고 길을 걷는 동안 그의 시선이 머무는 것들을 보았다. 그 안에는 어디든 자기 자신이 있었다. 어린 시절 보았던 아름다운 색과 독특한 패브릭의 질감, 살면서 만나 온 사람들과 관계의 흔적, 테라스에 키우는 꽃과 나무의 리듬 같은 것들.
선택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 강하게 필터링된 결과다. 타자와의 접촉 속에서 선택하고 남기고 다시 반복하는 사이에 어떤 형태가 드러난다. 아주 깊은 무의식에 쌓여있는 것들로부터 시작하여 끝까지 밀어붙인 것이 표면이라면, 그것을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얼마나 밀어냈는지에 따라 표면의 모양이 달라진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취향이 아니라, 한 사람이 살아온 방식, 삶의 구조, 즉 그만의 '원형'이다.
그리고 그 표면은 또다른 타자/세계와 마주치고 포개어지길 거듭한다. 가장 안쪽에서부터 밀어낸 내면의 에너지가 장력을 만들며 다른 세계와 접촉하고 마찰하는 사이, 손상된 자리에는 새로운 층이 생겨난다. 마치 이안리가 통영의 바닷가에서 자란 연인이 건네준 배의 껍질을 자신의 작업으로 들여온 것처럼. 살갗과 살갗을 맞대듯 서로의 세계가 포개어지고 마찰하며 새로운 시선이 탄생한다. 이 또한 우연은 아니다. 받아들인 것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안리의 표면은, 타자/세계와 반복해서 부딪히며 살아낸 감각이 끝까지 밀려나 도달한 자리이자, 그 시간이 퇴적한 장소이다.
장력의 자리
표면은 고정된 상태로 남지 않는다. 삶에는 언제나 밀물처럼 다른 것들이 밀려든다. 그리고 밀려온 것들은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잔여와 흔적을 남긴다. 또다른 접촉과 마찰을 겪으며 다시 변화에 접어든다. 변화는 사라짐을 동반한다. 선체가 완성된 직후부터 바다와 마찰하는 시간을 겪어내며 부식이 시작되듯이. 중요한 것은 완결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과 잔여를 감각하는 방식이다.
과거 이안리의 작업은 밀도 높은 완성도, 선명한 컬러의 대비가 돋보였다. 또한, 셰익스피어와 같은 문학적 서사와 상징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보이듯이, 이안리는 더이상 완벽함으로 작품을 밀어붙이지 않는다. 선체가 사라지고 남은 껍데기를 주워 몸을 부여하고, 시선을 겹치고 살갗을 접촉하듯 조각들을 이어 붙여 조금 어긋난 형상을 세운다. 무엇보다 현실의 자리로 내려와 삶이 만드는 작은 접촉과 마찰의 흔적에 오래 머무르길 택한다. 영속적이지도 고정되지도 않은 채 매 순간 변화하는 삶을 감지한다.
한편, 그는 발견된 오브제로 작업하는 기존 미술의 맥락 안에 있으면서도 조금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가 손에 넣은 배의 껍질은 통영이라는 특정 장소, 그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의 관계, 마을 사람들과의 연결 고리 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브제를 발견하는 방식 자체가 관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이안리의 작업이 삶이라는 현실에 보다 굳게 두 발을 붙이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한 사람으로서의 작가가 온몸으로 통과한 시절은, 작가의 세계를 확장하며 더욱 가장자리로 밀어붙인다. 그 힘은 서서히 작품이라는 표면 위로 드러난다. 더욱 자기 자신다워지는 방식으로. 이전의 작업이 감각을 밀어붙이는 과정이었다면, 이제 그는 삶을 더욱 밀어붙여 표면의 장력을 만드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현재 이안리의 작업은 결과로서의 표면이 아니라, 삶이 표면으로 밀려나온 상태를 다룬다. 이는 단순한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작업이 생성하는 방식 자체가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눈으로 마주하는 이 표면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이 전부가 된다.
삶의 원형
조금 어긋난 듯 보여도, 틈이 벌어져 있어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 삶이다. 아니, 오히려 머물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삶은 살아있는 것일 테다. 그 살아 숨 쉬는 것의 가장자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작가는 내게 '작업을 멀리 데려가 줄 수 있는 글'을 써달라고 했다. 쓰는 동안 그 말을 자주 떠올렸다. 글 한 편에 과연 그런 힘이 있을까. 그러나 이 글의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 다가오는 지금,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밀어내고 있는 글의 표면은 이안리의 표면과 접촉하며 새로운 마찰을 만들어낼 것이다.
등을 떠미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을 둘러싼 타자들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모두 서로 마주치고, 마찰하고, 비껴가며 새로운 세계로 미끄러진다. 가장 먼 곳으로 가는 길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얼마나 멀리 나아갈 것인지, 어떤 상태로 존재할 것인지는 스스로의 힘에 달려 있다. 삶을 밀어붙이고 또 밀어붙인 끝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닮은 표면이 남는다. 오롯이 남은 삶의 원형이다. 그러니 작가에게 삶과 작업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일 테다. 삶은 이러한 방식으로 예술을 떠민다. 더 먼 곳으로 향하는 작업의 곁에, 마침표 아닌 쉼표를 남겨둔다.
김지연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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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nnlee LeeBlue Root, 2026mixed media on canvas192.5 x 57.5 x 3 cm -
Ahnnlee Lee나는 침몰 이후에도 자라납니다 I grew after the sinking, 2026mixed media on canvas192.5 x 57.5 x 3 cm -
Ahnnlee Lee뿌리인간 Figure of Root, 2026mixed media on canvas192.5 x 57.5 x 3 cm -
Ahnnlee Lee나는 모든 것이 가라앉고 난 뒤 끝내 남는 것입니다 I Am What Remains After All Things Sink, 2026캔버스에 아크릴, 모래
sand, acrylic on canvas
227.3 x 181.8 cm -
Ahnnlee LeeOphelia, 2025mixed media on canvas91.5 x 117 cm -
Ahnnlee Lee물과 뭍 Terraqué 15, 2026선박 잔해물 위에 혼합재료 (mixed media on salvaged fiberglass boat fragments)80 x 50.5 x 5.5 cm -
Ahnnlee Lee물과 뭍 Terraqué 21, 2026선박 잔해물 위에 혼합재료 (mixed media on salvaged fiberglass boat fragments)68.6 x 60 x 5cm -
Ahnnlee Lee물과 뭍 3 Terraqué 3, 2025fiberglass, Korean lacquer 'ottchil', acrylic, steel bond, sand58 x 36 x 4.5 cm -
Ahnnlee Lee물과 뭍 Terraqué 19, 2026선박 잔해물 위에 혼합재료 (mixed media on salvaged fiberglass boat fragments)32 x 27 x 5 cm -
Ahnnlee Lee물과 뭍 Terraqué 17, 2026선박 잔해물 위에 혼합재료 (mixed media on salvaged fiberglass boat fragments)58 x 31.5 x 7.5 cm -
Ahnnlee Lee물과 뭍 Terraqué 19, 2026선박 잔해물 위에 혼합재료 (mixed media on salvaged fiberglass boat fragments)59 x 36 x 6 cm -
Ahnnlee Lee물과 뭍 Terraqué 23, 2026선박 잔해물 위에 혼합재료 (mixed media on salvaged fiberglass boat fragments)42 x 24.5 x 5.5 cm -
Ahnnlee Lee물과 뭍 Terraqué 25, 2026선박 잔해물 위에 혼합재료 (mixed media on salvaged fiberglass boat fragments)35 x 18 x 6 cm -
Ahnnlee Lee물과 뭍 Terraqué 26, 2026선박 잔해물 위에 혼합재료 (mixed media on salvaged fiberglass boat fragments)28.5 x 15 x 6 cm -
Ahnnlee Lee물과 뭍 Terraqué 20, 2026선박 잔해물 위에 혼합재료 (mixed media on salvaged fiberglass boat fragments)69 x 34 x 5.2 cm -
Ahnnlee Lee물과 뭍 Terraqué 22, 2026선박 잔해물 위에 혼합재료 (mixed media on salvaged fiberglass boat fragments)47 x 64.5 x 5 cm -
Ahnnlee Lee물과 뭍 Terraqué 28, 2026선박 잔해물 위에 혼합재료 (mixed media on salvaged fiberglass boat fragments)30.5 x 15.5 x 4.3 cm -
Ahnnlee Lee물과 뭍 Terraqué 30, 2026선박 잔해물 위에 혼합재료 (mixed media on salvaged fiberglass boat fragments)50 x 48 x 5 c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