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 You Tomorrow: Yukimasa Ida
실존에서 무의식으로
유키마사 이다(Yikimasa IDA)의 작품과 마주한다는 것은 상당한 힘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의 그림이 격렬한 붓의 움직임과 강렬한 색채, 무너져가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폭발하는 감정이 담긴 뜨거운 표현 앞에서 관람자는 ‘본다’는 행위를 마치 격투처럼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과연 이 녹아내리고 무너져가는 듯한 회화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미완성의 유동적인 형상들은 이제부터 동물이나 인간의 모습으로 결정화되려는 것인가. 아니면 무너져 사라지려는 것인가.
이다의 회화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랄 만큼 다양한 표현 방식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껍게 바른 물감이 솟아오르기도, 물감이 얇아 캔버스의 직조가 그대로 보이기도 한다. 솟아오른 물감은 때로 주제의 강렬한 존재감을 나타내지만 한편으로는 단순히 추상회화를 이루는 하나의 부품이나 파편 같다. 그의 회화에서 추상이냐 구상이냐를 논하는 것은 결국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분류는 그의 회화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강렬한 버밀리언을 사용해 주제를 두드러지게 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갈색 계열의 색채를 사용해 깊이 가라앉은 듯한 부분도 있다. 밝고 팝적인 색채가 있는가 하면 황혼 속의 사람 그림자처럼 어두운 색채도 있다. 두껍게 올린 물감부터 수채화와 같은 사용법에 이르기까지 표현 역시 다양하다. 주제도, 색채도, 무엇을 그리고자 하는지도 그 선택과 사용법이 매우 자유롭다. 그에게 회화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실험의 장이다.
인간과 실존
이다의 주제는 인물상이 많다는 점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초상화에는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프랜시스 베이컨과 같은 화가들을 비롯해 친구와 가족들이 등장한다. 거기에 규칙은 없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집착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작가의 초상은 개개인의 인격을 묘사하려는 것도, 인물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리고자 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많은 얼굴이 파괴되고 녹아내리며 두껍게 바른 물감으로 뒤덮인다. 그 결과 얼굴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익명의 인간 초상으로 수렴한다. 그가 그리려는 것은 개별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존재일 것이다.
이다는 개인전을 맞아 출판한 도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캔버스의 표층에 이미지를 표출하려 할 때, 추상인지 사실인지조차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생성되어 간다. 마주하는 대상과 나 사이에 발생하는 파탄과 구축. 존재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결론이 나지 않는 질문.’ (Yukimasa IDA, 『Crystallization』, 2020, 미술출판사)
그가 그린 수많은 초상화는 사람들과 만나고 관계를 맺었다는 증언이라 할 수 있지만 인물 각각의 의미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는 모호하게 무너지고 사실적 묘사에서 멀어진다. 오히려 그에게 문제 되는 것은 스쳐 지나간 사람들에 관한 기억이며 기록이고 존재의 증명이 아닐까.
나는 이다의 작품을 움직이는 원동력에서 실존을 기록하고자 하는 의지를 본다. 그러한 의지는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드러난다.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라면, 나는 적어도 내가 경험한 기억을 결정화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보석을 만들듯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그리고 그것을 위한 모티프로서 나는 인간이 필요했다.’ (Yukimasa IDA, 『Crystallization』, 2020, 미술출판사)
기억과 흘러가는 시간
인간의 삶은 제행무상이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모든 것은 변화한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허무하다. 그러나 그 허무에 유일하게 쐐기를 박는 것이 기억이다. 우리는 기억 역시 덧없고 연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기억에 매달리려 한다. 아니, 거꾸로 생각해보면 미술을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기억을 믿는다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감각은 이다가 이야기해온 ‘이치고 이치에(一期一会)’와도 이어진다. 피카소 미술관에서 열린 이다의 개인전 주제 역시 ‘이치고 이치에’였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피카소의 삶의 방식은 이다로 하여금 단 한 번뿐인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이치고 이치에는 이다의 섬세한 감수성 속에 자리한 덧없음에 대한 공감과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는 말일 것이다.
역사적인 회화를 인용하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은 작품에 대한 오마주이자 찬사이며, 그것을 그린 화가의 기법과 구도, 회화 제작 방식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다. 동시에 ‘나라면 그렇게 그리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자신만의 창조 역시 내포되어 있다.
이번 오아르미술관(경주)과 우손갤러리(대구) 전시에는 새로운 시리즈로 반 고흐의 초상화와 〈Starry Night〉을 차용·인용한 회화가 포함된다. 이다는 고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 도전에 흥미를 느꼈다. 왜냐하면 고흐가 만들어낸 작품의 이미지는 이제 고흐가 죽은 뒤에도 전 세계에 퍼져 알려져 있으며 역사를 관통해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흐에 대한 기억은 이미지로서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그가 남긴 강렬한 이미지들을 내 안에서 콜라주하고 혼합함으로써 화면에 어떤 새로운 생명을 생성한다. 그러한 신선한 도전으로서 이 시리즈를 제작했다.”
초상화에 비하면 그 수는 적지만 풍경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그림이 호응하는 풍경 앞에 선다. 사실적 묘사를 지향하지만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람과 빛, 그림자와 생명이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흘러간다. 풍경 역시 그 모습의 한순간을 붙잡아두기 위해 그려진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현실과 그것을 기억 속에 붙잡아두고자 하는 회화에 대한 절실한 마음은 〈End of Today〉 시리즈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당 작품들은 이번 서울 전시에서 소개된다. 이 시리즈는 그가 하루를 보낸 뒤 마지막 순간에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고 그날 느낀 것을 기록하듯 그린 소품이다. 이미지로 쓴 일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0년 이상 이어져 온 연작은 이미 방대한 규모에 이르렀으며 작가의 개인적인 라이프워크가 되었다. 또한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의 끝에 그리는 [End of today]. 그림의 틈 사이로 보이는 캔버스는 그날의 여운일까, 아니면 나 자신의 거울과 같은 것일까. 소설 속 행간을 느끼는 것과 같은 순간이 날마다, 아니 분명 1분 1초 속에 숨어 있다. 그것을 찾아가며 나는 매일 화면과 마주한다.’ (Yukimasa IDA, 『Crystallization』, 2020, 미술출판사)
무의식을 향하여
또한 한국 전시를 위한 인터뷰에서 이다는 지금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의식’과 ‘무작위’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저편에 존재하는 영역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순간, 혹은 계산을 포기한 순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로서 결정적으로 성립해버리는 미적인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대체 왜 일어나는 것인가. ‘무의식’이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이론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인간의 의식 아래에 존재하는 무의식에 주목하고 오토마티즘이나 꿈, 우연성 등을 통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영역을 예술 속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이다는 초현실주의에서 말하는 무의식과는 다른 영역을 탐구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앞으로의 작업은 ‘작위 없는 무작위의 영역’이 과연 무엇을 가져오는가를 실험하는 방향으로 더욱 깊이 나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망각되어가는 과거와 존재의 증명을 추구하며 ‘실존’을 형상화해온 이다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무의식의 영역을 향해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번 한국에서 열리는 개인전은 이다의 과거와 현재를 그려내면서 미래를 향한 길을 열고 있다.
난조 후미오 Fumio Nanj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