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풍경, 쌓인 형태: 김세은, 김정은, 문이삭, 이승애, 황원해
Fluid City, Layered Forms 흐르는 풍경, 쌓인 형태
대구와 서울, 직각의 빌딩과 사선지붕의 주택, 번화한 도심부와 조용한 주택가. 서로 다른 두 장소에서 운영되는 우손갤러리의 환경은 오늘날 도시 풍경의 보편적 단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 전시는 이질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위화감 없이 서로 닮아 있는 두 장소를 목도하며 구상되었다.
과거의 도시는 농촌과 명확한 경계를 둔, 성장 중심의 물리적 공간이었다. 산업화와 집약적 생산성을 기반으로 한 특수성을 지녔던 것이다. 그러나 교통과 통신망의 비약적 발전이 거듭된 오늘날, 도시는 배타적 경계를 넘어 모호한 광역권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변모했다. 경계 없이 연결된 네트워크와 다양한 삶의 방식이 공존하게 된 도시는 일종의 보편적 정주 조건이 되었고, 그 보편성의 확장은 역설적으로 도시 특유의 고유성을 잠식해왔다. 익숙한 간판, 유사한 형태의 건물,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 위에서 장소 고유의 정체성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흐르는 풍경, 쌓인 형태》는 이처럼 물리적 형태가 더 이상 도시의 특성을 규정하지 못하는 시대, 그 안을 살아가는 우리의 심리적 풍경을 주목한다. 전시는 인공적 요소들이 재배열된 형태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유동적 풍경을 탐색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시선을 통해, 오늘날 도시를 이루는 일상적 추상성을 다룬다. 참여작가들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도시의 환경이나 현실적 문제를 개인의 심상과 결부시켜 보다 추상적인 차원의 풍경으로 변모시킨다.
김세은은 갈라진 도로, 터널과 같은 도시의 보편적 구조물이 등장하는 풍경을 반추상적으로 묘사한다. 그의 화면은 자동차의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속도감을 전제로 한다. 일정한 속도의 움직임 속에서 무언가를 응시하고 관찰하는 것은 오늘날 도시의 빈번한 시각적 경험이다. 이 흐르는 시선은 구체적인 형태를 추상적 색면으로 탈바꿈시키며, 그 자체로 본질적인 추상회화의 심상을 구축한다.
김정은은 기호화된 지도에 자신의 신체 감각을 결합하는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그는 일상적으로 지나는 장소의 역사적 사실이나 숨은 의미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보폭과 같은 주관적 단위를 새로운 질서로 부여하는 이동 과정을 시각화한다. 이 과정을 통해 구체적 지명이 담긴 작품의 제목은, 결국 추상적이고 신체적인 감각의 기호로 치환된다.
고전적인 조각의 새로운 조형 언어를 모색해 온 문이삭은 각기 다른 함의를 지닌 이질적 재료들을 도자 기법으로 조합한 작품을 선보인다. 수집가능한 16종의 백색 점토로 익숙한 문화적 아이콘을 재조형한 <백월> 연작과, 서로 다른 점토의 물성 및 재료 간의 이질적 조합이 공간적으로 연결되는 <Bust-바람길> 시리즈는 오늘날 도시의 흔한 모습인 이형적 축조의 풍경을 상징한다.
흑연이라는 단일 재료로 회화와 무빙이미지를 창작하는 이승애는 형상의 이면에 담긴 추상적인 요소들에 주목해왔다. 영상과 평면으로 구성된 <디스턴트 룸>은 팬데믹으로 물리적 이동이 불가하던 시기, 본인이 정주하던 두 도시에서의 기억과 상실감을 추상적이고 심리적인 공간으로 재탄생시킨다. 맞은편의 영상작품 <The Room>은 비현실적 요소들로 구성된 현실적 풍경을 통해 심리적 공간의 초현실성을 구현한다.
황원해는 공항이나 역처럼 수시로 방문하는 비장소(non-place)에서 느끼는 보편적 감각이 개인의 내밀한 심상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초기 명확한 도시의 형상에서 출발했던 그의 회화는, 이제 눈앞의 장면과 기억 속 이미지가 공존하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다룬다. 도시 표면을 채우는 수직의 구조물과 축적된 형태들은 그의 캔버스 위에서 지속적인 운동감을 야기하는 추상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제 신진의 단계를 넘어 작가로서의 고유하고 묵직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참여 작가들은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풍경과 형태 사이의 긴장과 연결을 시각화한다. 각각의 작업에는 단절과 연속, 내부와 외부, 흔적과 형상이 얽히며 사유의 지층으로 재구성된 풍경이 펼쳐진다. 전시 공간에 여러 갈래로 ‘쌓인 형태’들은 본래의 좌표를 상실한 채, 관람자의 경험과 기억 속에서 비로소 ‘흐르는 풍경’으로 완성된다. 결국 이 전시는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도시의 견고한 모습이 실은 지극히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추상성 위에 서있음을 드러낸다. 이 전시가 도시에서 유목하고 정주하는 많은 관람객들에게 익숙한 도시의 이면을 감각하고, 자신만의 유동적 풍경을 사유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고원석은 예술경영학을 전공했고 대안공간 풀, 공간화랑, 아르코미술관, 베이징 아트미아재단,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부산시립미술관 등에서 전시나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2018년부터 5년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교육과장으로 일했다. 동시대의 다양한 문화지형도에서 미술이 수행할 수 있는 미래적 역할과 사회적 기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는 라인문화재단 디렉터로 근무하며 서울시 성북동의 새로운 미술관 건립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다.